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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독서노트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존 허스트)

by Say_Young 2023. 2. 26.

 

1. 유럽의 문명은 세계의 나머지 부분들이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유일한 문명이라는 점에서 비길 없이 독특하다. 유럽은 정복과 정착을 통해서, 자신의 경제력과 사상의 힘으로 다른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다른 모든 세력이 원했던 것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과학상의 발견과 거기에서 비롯된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데, 바로 과학이 유럽의 발명품이다. 

초기 유럽 문명은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1)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

(2) 기독교, 종교는 유대인의 종교로, 유대교의 기묘한 분파다.

(3) 로마제국을 침략한 게르만 전사들의 문화.

 

2.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보다 싸움을 잘했다. 그들은 그리스인들보다 법률에 능통해서 법률을 이용해 제국을 운영했다. 또한 그리스인들보다 공학 기술이 뛰었났는데 이런 점은 전투를 하고 제국을 운영하는 매우 유용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점에서 그리스인들이 자신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그들을 그대로 모방했다. 

 

3.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의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모두 상이한 모양과 상이한 색상을 지니고 있다. 온갖 종류의 일들이 동시에 무작위로 무질서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모든 것에 아주 간단한 설명이 있다고 믿었다. 모든 다양성 밑에는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단순하고, 규칙적이고, 논리적인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바로 기하학 같은 말이다. 

 

4, 유대인들은 신이 오직 하나뿐이라고 믿었는데, 이것은 아주 이례적인 견해였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신은 여럿이라는 좀더 일반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5. 혼합의 번째 요소는 로마제국을 침략한 게르만 전사들이다. 그들은 북쪽 경계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400년대에 물밀 듯이 밀려들어왔다. 

 

6. 이제까지 가지 요소를 검토했으니 이제 요약해보자.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세계는 단순하고 논리적이며 수학적이다' 것이었다. 기독교도들의 생각은 '세상은 악이고 그리스도만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것이었다. 게르만 전사들의 생각은 '전투는 재미있다' 것이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유럽 문명을 형성한 것은 바로 요소의 혼합이다. 

 

7. 콘스탄디누스 황제가 313년에 기독교도가 되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기독교 교회를 공식적으로 후원했다. 그는 신이 자신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국을 보살펴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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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가지 요소들 사이의 번째 연결이다. '로마제국이 기독교화되다.'

이제 교회는 초창기의 모습과 아주 달라졌다. 처음에 기독교도 집단은 개인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3, 4세기가 지난 사제, 주교, 대주교로 구성된 정규직 공직자들의 위계 조직이 되었다. 여러 주교들 주에 하나였던 로마 주교는 스스로 교황이 되어 교회를 통치했다. 교회는 자체의 법체계와 법을 집행할 법정과 감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돈을 내야만 했기 때문에 교회는 자체의 조세제도를 운용하고 집행했다. 

로마제국이 붕괴되었을 , 자체로 하나의 정부였던 교회는 살아남았다. 교황은 로마 황제에 필적하는 인물로, 자기 밑에 있는 공직자들의 위계 제도를 지배했다. '교회가 로마화되다.' 이것이 번째 연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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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이 붕괴된 후에 교회는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을 보존했다. 움직임은 제국의 붕괴 전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었는데, 아주 놀라운 발전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모든 작가, 철학자, 과학자가 기독교도가 아니라 이도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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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고 옹호하기 위해서 그리스 철학과 논리학을 이용했다. 학자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한 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이 어느 정도 진리를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완전한 진리이지만 그리스 철학자들을 그리스 철학자들을 논쟁하는 끌어들여서 진리로 인도하는 안내자로 이용할 있다고 여겼다. 이런 논리로 비록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도교였지만 그들의 저작을 보존하고 이용했다. 이것이 번째 연결이다. '교회가 그리스와 로마의 학문을 보존하다.'

 

8. 왕들은 많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오래 싸워야 했다. 다시 말해 귀족들의 손에 좌우되지 않고 통치하기 위해서, 왕의 고유한 조세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 왕이 완전히 통제하는 군대를 갖기 위해서 싸웠다. 하지만 허약한 지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왕이라고 해도 결코 위협할 없는 어떤 것들이 있었다. 사유재산은 신성불가침한 것이 되었다. 귀족은 조건부로 차지한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전환시켰다. 이런 점은 언제나 정부에 걸림돌이 되었고 유럽의 왕은 권력을 가진 뒤에도 동방의 전제군주처럼 없었다. 동방의 전제군주는 영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했다. 재산이 필요하다면 누군가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군대를 저잣거리로 보내서 팔고 있던 물건을 빼앗아 오라고 명령하면 그만이었다. 유럽의 정부들은 '절대적'이라고 불릴 때조차도 결코 그와 같이 행동할 없었다. 

'모든 것이 왕의 것은 아니다' 정부에 대한 유럽식 사고의 기초였다. 정부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관념은 최초의 정부가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리고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에서 개인의 권리라는 관념이 나오는데, 이는 서유럽 전통의 핵심이다. 

정부에 대한 제한은 경제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의 경제가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없는 방식으로 발전할 있었던 것은 상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9. 주교들은 기독교 신을 받아들인다면 많은 적을 죽이게 것이라는 점을 전사들에게 아주 빠르게 납득시킬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사람들의 종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특별한 부류의 정복자였다. 교회는 새로운 통치자들, 왕과 귀족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의 의무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아주 분명히 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연결이다. '게르만 전사들이 기독교를 지원하다.'

 

10. 기독교가 상황에 따라 형태는 조금 달라졌지만 기본적으로 호전적인 종교는 아니었다. 예수가 " 원수를 사랑하라" 말한 것을 봐도 그렇지 않은가. 초기 기독교도들은 병역을 거부했는데, 이것이 로마인들이 기독교도들을 의심한 이유 하나였다. 그런데 이저 기독교도들은 게르만 전사들과 제휴를 맺었다. 원수에게 다른 뺨을 내미는 종교가 냉혹하고 무쇠 같은 사람들의 지원을 받는다. 모순은 도대체 뭔가? 모슨은 보기보다 그리 크지 않은데, 일단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인정받고 국가의 공식 종교가 되고 뒤에는 폭력에 대한 견해를 바꾸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싸워야 했고 교회가 정부의 지원을 원한다면, 교회는 정부가 때로는 정당하게 싸울 있다는 데에 동의해야만 했다. 

그러나 교회가 처음 전사들과 협력할 때는 그들의 가치를 완전히 수용하지 않았다. 세기에 걸쳐서 전사는 천천히 기사로 변화했다. 기사는 게르만 전사들처럼 싸움을 사랑했으며 자신의 싸움 능력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대의명분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교회는 기사들에게 비기독교들과 싸울 것을 독려했는데, 이는 실로 매우 훌륭한 대의였다. 교회가 먼저 당시 무슬림의 수중에 들어가 있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운동을 촉진했고, 그곳에 가서 싸우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허가를 내려 주었다. 

 

11.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을 보존한 것은 상당히 적극적인 행위였다. 단순히 우수한 책들을 벽장 안에 집어넣고 내버려 아니었다. 책들이 살아남은 것은 교회가 중세 시대 내내 베껴 쓰고 또다시 베껴 썼기 때문이었다. 

 

12. 혼합이 중세 시대에 어떻게 작동했는지 요약해 보자. 기독교도 기사가 되어 가는 전사들이 있었고, 기독교를 뒷받침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이 있었다. 기묘한 동맹의 중간에서 교회가 이럭저럭 모든 것을 결속시키고 있었다. 지식은 기독교적이고, 기사들은 기독교도들이고, 세계는 기독계 세계, 그리스도의 영토다. 

1400 이후, 이상한 동맹은 쪼개지기 시작하고 역사가들이 근대라고 부르는 것이 시작된다.

 

13. 르네상스: 유럽의 세속화

유럽 문명을 형성한 혼합물은 불안정한 것이었다. 중세 내내, 1,000 동안 지속되었지만 구성 요소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1400 즈음에 혼합물은 부서지기 시작했다. 바로 르네상스에서 처음 발생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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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종종 그리스와 로마 지식의 발견 또는 재발견으로 묘사된다.그러나 시기에 가지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잊혀졌다가 재발견되어야만 했던 지식이 드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가장 변화는 오로지 신학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대의 지식을 이용한 교회 대신에 교회 외부에서 신학과 무관하게 연구하는 학자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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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통해 혼합물을 붕괴시켰다. "고전이 최고다."

 

14. 종교개혁: 기독교 교회의 붕괴

르네상스는 중세 세계의 번째 거대한 붕괴였다. 번째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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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화형을 모면한 이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였다. 

루터는 자신의 종교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 수도승이었다. 그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 고뇌했다. 많은 그가 구원받기 위해서 있는 일인 무엇일까? 그런데 루터는 성서에서 로마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읽다가 갑자기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당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으로부터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행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 특히 사제의 지배하에 들어가서 그의 지도를 따라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추론해 냈다. 당신이 해야 일은 믿는 , 신앙심을 가지는 것뿐이었다. 믿음만이 당신을 구원해줄 것이다. 이것이 루터파의 중심 메시지다.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러면 구원받을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을 것이며, 교회가 이야기한 대로 좋은 일을 하고 싶고, 그리스도가 명한 대로 행동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체가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교리가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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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교리와 관행을 성서에 기초하게 함으로써 교회를 개혁하려는 운동이었다. 그것은 초기 교회의 삶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종교개혁의 메시지는 이러했다. "기독교는 로마의 것이 아니다."

 

15. 근대과학과 진보

우리는 이제 유럽 문화가 미래 지향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아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 사태가 좋아질 것이라는 진보를 믿는 것은 너무 낙관적이라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어떻게 유럽 문화가 진보를 믿게 되었을까? 진보에 대한 믿음은 17세기 과학혁명의 결과로 생겨났다. 17세기는 우리의 근대과학이 시작된 시기다. 

 

16. 과학자들은 얼마나 총명했던가. 그런데 총명함이 그들을 어디로 데리고 갔는가? 과학자들은 인간이 주변적인 존재이며,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이 서양 세계가 공통적으로 처한 곤경이다. 우리는 아주 총명하지만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있다. 찰스 다윈이 인간과 원숭이가 공통의 조상을 지니고 있다는 견해를 제기한 19세기에는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주장은 인간과 인간의 추론 능력을 강등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고,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며, 우연할 일들의 체계에 의해 동물의 왕국에서 계통을이어받은 후손들이다. 

 

17. 계몽주의: 이성의 발견

이성을 최고의 권력으로 만들려는 이러한 바람이 계몽주의, 사회 개혁, 정부, 도덕, 신학에 이성을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18세기 지적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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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는 혁명운동이나 정치적 운동이 아니었다. 계몽주의는 이성과 교육이 확산되면 미신과 무지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기적 혹은 왕은 하나님의 재가를 받아 통치하는 것이라는 허튼소리를 믿지 않게 것이라고 확신한 학자, 작가, 예술가, 역사가들의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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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계몽주의의 위대한 업적은 백과사전을 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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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의 메시지는 이러했다. "종교는 미신이다."

 

18. 민족주의와 낭만주의

계몽주의의 이념은 18세기 프랑스혁명에서 시험을 치렀다. 이성이 있는 것에 대해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프랑스혁명은 왕과 교회가 일소된 새로운 계몽의 시대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혁명은 유혈 사태, 전제정치, 독재 정권을 초래했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기 , 기묘한 혼합물의 마지막 요소, 게르만 전사들의 묶여 있던 밧줄로부터 풀려나왔다. 이것은 18세기말, 19세기초의 낭만주의 운동과 함께 발생했다. 

낭만주의 운동은 감정, 정서, 모든 정념을 믿었다. 점에서 낭만주의는 유럽 전역에 걸친 운동이었지만 독일에서 가장 강력했고, 가장 완전하게 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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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으로 문화를 바라보고 존중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시점, 지식인들이 처음으로 민속 문화를 수집하기 시작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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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낭만주의 작가들은 민족주의에 공식적인 사고, 이데올로기를 제공했고 민족주의는 여전히 근대 세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민족주의는 자신만의 문화와 언어를 지니고 있는 뚜렷이 구별되는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자기들만의 정부를 지녀야 한다고 선언한다. 

 

19. 유럽 사회가 맞은 가지 거대한 침임 가운데 번째는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을 침입한 것이다. 다음에는 무슬림이, 마지막으로 노스인 또는 바이킹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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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이후, 유럽을 향한 침략은 멈추었다. 노르만족은 정착했고 선교사들이 노르웨이와 스웨덴으로 들어가서 나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교역이 활기를 되찾고 타운들이 확장되었다. 유럽 사회는 이제 자신의 원정대를 파견할 만큼 충분히 안정적이고 강력해졌다. 

 

20. 인민이 민주주의를 직접 책임지고 담당했다고 하면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와 아주 상이한 체제였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 모든 국민이 장소에 모일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안건에 대하여 인터넷으로 참여할 있는 국민투표가 있다면 그리스의 체제를 재현할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여론조사의 결과처럼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 이외의 나라에서 이주자를 데리고 오는 정책을 가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 아시아계 이주자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범죄자들은 교수형에 처해졌을 것이 거의 확실하고 체형을 가했을지도 모른다. 해외 원조 같은 것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혼모들은 그들의 연금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을 것이고 학생들은 장학금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국민의 무지와 편견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행사되어서는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입장에 이르렀다면 이제 아테네의 위대한 철학자들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가까워진 것이다. 그들은 아테네의 민주정치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의 비판은 민주정치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이해하는 도움이 된다. 이들은 민중이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하며, 무지하고, 쉽게 동요된다고 불평했다. 통치는 지혜와 판단력을 필요로 하는 섬세한 기예인데 모든 시민이 지혜와 판단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철학자들은 우리의 대의제 체제에 훨씬 만족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대표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 그들은 국민 전체와 비교해서 일반적으로 교육받았으며 견문이 넓다. 정치인들은 매우 유능한 사람들이 소속된 공무원 조직의 안내를 받는다. 그래서 민중이 직접 나서지 않고 정부의 전체 업무에 대해서 훈련받았으며 깊이 사고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취합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21. 서쪽에서 로마제국을 대체한 국가들은 매우 원시적이었다. 국가의 토대는 과거 전사들의 우두머리였던 왕이 추종자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대가로 추종자들은 그에게 전투부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은 조세나 어떤 정교한 통치 기구가 없어도 군대를 손에 넣었다. 이런 방식으로 장악한 토지는 봉토 또는 라틴어로 페우둠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영어의 봉건(feudal)이라는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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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 군대의 특성에 변화가 발생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세계에서는 보병이 군대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에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다. 동방에서 유럽으로 들어온 발명품인 등자는 말등에 올라탄 사람을 훨씬 강력하게 만들어주었다. 양쪽 등자에 발을 집어넣고 안장에 앉으면 더욱 안전하게 말을 있었다. 등자는 보병이 그를 공격해서 떨어뜨리는 것을 훨씬 어렵게 만들었으며, 말에 사람은 자신의 힘과 무게를 말의 그것과 결합하여 하나처럼 움직일 있었다. 등에 앉아 창을 들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사람은 아주 강력한 전쟁 기계였다. 말을 사람들은 기사거나 수련 기사들이었는데, 이들은 스콰이어들이라고 불렸다. 대토지를 소유한 영주들은 왕의 업무를 위해수많은 기사들을 제공했다. 

영주를 왕에게 속박시킨 것은 충성 서약이었다. 영주는 무릎을 꿇고 맞잡은 손을 들어 충성을 맹세했다. 왕이 영주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올리면, 영주는 왕의 사람이 되어 그에게 봉사하겠다고 약속했다. 충성 서약이 이루어진 후에는, 신하가 일어서서 왕과 마주선 서로 키스를 했다. 이것은 상호 종속적이고 평등한 의식으로 관계의 특성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신하는 왕이 자신을 보호하는 한에서 충서앟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서유럽에서 왕권이 자리를 잡아 가던 초기에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암묵적인 계약이 있었는데 이런 관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22. 봉건 군주들은 매우 힘이 약했기 때문에 어쩔 없이 나라 안의 강력한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구해야 했다. 군주들은 자신이 완전히 통제하는 군대나 정기적인 조세제도, 공무원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중요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조언을 듣고 동의를 구했다. 이렇게 조언을 받아들이는 체계는 성직자, 귀족, 그리고 평민이 의회에서 만나면서 공식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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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는 개의 의회, 삼부회가 있었다. 하나는 성직자 대표들이고, 하나는 귀족이고, 번째는 평민 대표였다. 잉글랜드에서는 대주교와 주교로 대표되는 성직자 집단과 귀족이 귀족원에서 함께 모였고, 평민들은 다로 평민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명칭은 군주제와 더불어 중세 시대의 유산인 현대 영국 의회에서도 존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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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의회들은 통치의 상시적인 일부가 아니어서 군주가 필요로 때에 소집되었다. 법률을 통과시키는 것은 그들의 주요 업무가 아니었다. 군주가 추가 세입이 필요할 의회를 소집했다. 중세의 왕들은 아주 빈약한 토대에서부터 권력을 쌓아 올렸다. 그들은 자신의 토지에서 나오는 소득과 정기적으로 거둬들일 있는 세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주로 전쟁 같은 이유로 비용이 증가하면 특별히 세금을 징수할 필요가 있었고 안건을 승인하기 위해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면 의회는 불평을 늘어놓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의 대신들이나 의회의 의원들에 의해 발의된 가지 새로운 법률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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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륙에서는 군주들이 정기적으로 서로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왕은 육군을 발전시킬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육군보다 해군이 필요했는데, 해군은 왕이 국내의 적들을 통제하는 쓸모가 없었다. 반대로 잉글랜드에서는 대규모 상비 육군을 보유하기를 원하는 왕은 잉글랜드의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이런 점이 잉글랜드 왕들이 필요하다면 그들의 신민들에게 향할 수도 있는 군사력을 얻는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17세기에 잉글랜드의 군주들은 유럽의 경향에 따라서 전제군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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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의 아들 찰스2세는 신학과 의식에서는 오늘날 고교회주의라고 알려진 것을 선호했는데, 그것은 청교도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너무나 로마 가톨릭에 가까운 것이었다. 찰스는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잉글랜드 국교회에 자신의 견해를 강요해서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리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왕비가 가톨릭교도였으며, 그녀가 궁정에서 미사를 올릴 있도록 따로 성직자를 두는 장치를 특별히 마련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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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는 의회와 교착 상태에 빠졌고 11 동안 의회 없이 통치했는데, 의회는 왕의 명에 의해서만 소집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자격이 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다시는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방법을 찾으려 했는지 모르지만, 매우 어리석게도 자신의 다른 왕국인 스코틀랜드 국민들에게 자신이 선호하는 숭배 방식을 강요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인들은 프로테스탄트적인 성향이 강했고, 성격도 불같았다. 그들은 무력으로 찰스를 단념시키기 위해 잉글랜드로 군대를 파견했다. 찰스는 스코틀랜드인들과 싸우기 위해서 군대가 필요했고 어쩔 없이 군대에 지출할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기회를 잡게 되자 교회와 국가에 대한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의회의 권력을 증대시키려고 했다. 의회는 찰스의 주요 각료와 그의 고교회파 켄터베리 대주교를 처형했다. 찰스는 처음에는 의회의 수중에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를 지지하는 왕당파를 규합했다. 그리하여 의회파와 왕당파는 전쟁에 돌입했다. 의회가 전쟁에서 승리했고 의회파의 사령관인 올리버 크롬웰이 재판을 조직하여 1649년에 왕을 처형했다. 그리고 나서 크롬웰은 왕을 대신하여 통치했다. 그는 의회를 소집했으나 의회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잉글랜드는 사실상 군사독재 정권이었다. 

 

23.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의 주장을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가서는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는데도, 찰스 2세는 왕과 의회의 권력에 어떠한 공식적인 변화도 없이 치세를 시작했다. 그는 가톨릭의 교의에 공감했고 임종에 이르러서 가톨릭교도가 되었다. 그에게는 정부가 낳은 자식들은 많았지만 왕비가 낳은 자식이 없었다. 다음 왕은 그의 동생 제임스가 것이었는데, 그는 공공연한 가톨릭교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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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잉글랜드가 제임스 2세라는 가톨릭교도 왕을 얻은 바로 순간, 1685년에 프랑스에서는 프로테스탄티즘이 공격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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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가 탄생하자마자, 의회의 거의 전원이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의회 지도자들은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에게 잉글랜드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왕위를 취할 것을 요청했다. 사람은 네덜란드 사람, 오렌지 가문의 윌리엄인데, 그는 제임스와 그의 번째 프로테스탄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와 결혼한 ㅏㅅ람이었다. 윌리엄은 유럽에서 프로테스탄트 대의를 옹호하는 투사였으며 루이 14세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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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는 아일랜드로 달아났는데, 의회가 그를 심문하거나 그의 목을 자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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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의회의 권력은 이제 의회에 의해 다시 정의되었으며 오직 조건하에서만 윌리엄과 메리에게 왕위를 인정해 주었다. 헌정을 자시 고쳐 문서는 <권리장전>이라고 불린다. 여기에는 의회를 위한 권리와 개인을 위한 권리가 함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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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의회는 의회 자체를 헌정의 영구적인 일부분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전혀 피를 흘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의회에 의한 쿠데타는 '명예혁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24. 권리장전은 의회, 입법부가 정부 조직에서 강력하고 영구적이며 독립적인 부분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임명한 행정부, 국왕과 그의 각료들로부터 판사들의 독립도 확보되었다. 국가는 프로테스탄트로 확고하게 굳어져서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의 자유를 보증하는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교황과 주교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개인의 양심과 경험의 고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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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들과 오랜 전투를 치루는 동안에, 의회 의원들은 대륙의 절대군주들처럼 행동하려는 생각을. 품은 왕들을 좌절시키는 필요한 것들(국왕은 의회를 소집해야만 하고, 의회 없이 과세할 없으며, 법정을 통제해서는 된다) 산출해 냈다. 광범위한 원칙은 승리를 쟁취한 이후에 명백해졌다. 

 

25. 초기 프랑스혁명은 잉글랜드의 정부와 같은 입헌군주제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1780년대에 군주가 파산에 직면했기 때문에 개혁가들이 기회를 잡을 있었다. 루이16세는 무너질 같은 조세체계를 일률적이고 공정하며 효율적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품은 개혁적인 재무 장관들을 고용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귀족도 처음으로 다른 모든 사람과 동일한 세율로 세금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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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세금 지불을 요청받자 빗발치듯 항의를 제기했으며 고대의 권리에서 비롯된 전제군주적인 공격에 대한 저항은 이상하리만큼 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왕의 절대주의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175 동안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삼부회를 구성하는 방법에 대한 맹렬한 주장이 즉각 터져 나왔다. 계급 또는 신분(성직자, 귀족,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 3신분'으로 불렸던 평민)각각이 자신들의 의회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법안은 의회 모두가 동의해야만 채택되었다. 3신분의 지도자들은 주로 법률가들이었는데, 귀족과 성직자들로부터 동의를 얻어야만 한다면 자신들이 프랑스에 새로운 헌정을 부여할 있는 기회가 희박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의회가 함께 회합을 열어서 표결을 것과 3신분의 , 근면함, 부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대표수를 배로 늘릴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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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에 삼부회가 개최되었을 주장은 계속되었다. 3신분은 스스로를 진정한 국민의 의회, 국민의회라고 선언하고 다른 계급들에게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어느 그들이 베르사유의 왕국에 있는 모임 장소에 도착했을 출입문이 모두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문이 닫혀 있었던 이유는 그저 방에 페인트칠을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대표들은 국왕이 국민의회를 폐쇄하려 한다고 생각해서 매우 흥분했다. 그들은 즉시 근처에 있는 실내 테니스 코트로 가서 프랑스를 헌법을 가진 나라로 만들때까지 해산하지 않기로 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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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회의 지도자들은 계몽주의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분명하게 자유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원칙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슬로건은 자유, 평등, 우애였다. 국민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제목으로 선언문을 발표했다. 권리는 단지 프랑스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권리였다. 

 

26. 교황과 황제는 서로의 권력을 강화하는 이바지했다. 황제들은 교황의 영토를 보호하는 것을 비롯해서 교황의 지위를 보호했다. 가끔 황제들은 ' 베드로의 의자' 책략가가 아니라 경건한 교황이 앉게 하기 위해서 로마에 개입했다. 교황들은 황제들에게 왕관을 씌워 주고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해 줌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강화해 주었다. 하지만 11세기부터 둘의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는데, 교황이 교회는 로마가 운영해야 하며 왕과 군주는 교회의 일에 간섭해서는 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7. 모든 안락한 장치들을 뒤엎게 권위를 로마로 다시 가져오기를 원한 교황은 그레고리우스 7세로, 그는 1073년에 교황이 되었다. 그는 앞으로 주교는 자신이 임명하겠다고 선언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이 주교를 임명하겠다고 대응했다. 황제는 완강했고 그래서 교황은 그를 파문했다. 다시 말해 그를 교회에서 추방했다. 황제는 이제 미사에 참여하거나 교회가 제공하는 어떤 업무도 이용할 없었다. 국왕을 파문함으로써 교황은 왕의 영토에서는 사람들에게 왕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어서. 이것은 교황들에게는 언제나 아주 강력한 무기였다. 이번 경우에는 황제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던 독일의 공작과 제후들이 황제가 파문당했기 때문에 그를 무시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주 기뻐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만나기 위해 한겨울에 알프스산맥을 넘어가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에 있는 성으로 갔다. 그는 눈이 내리는 가운데 2~3 동안 밖에서 기다리면서 교황에게 만나 것을 간청했다. 그는 왕권을 상징하는 모든 상징물들을 벗어던지고, 초라한 옷을 입었다. 마침내 교항은 마음을 풀었고 황제는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교황은 파문을 철회했는데, 이것은 독일 제후들을 아주 곤란하게 만들었다. 물론 하인리히에게는 행위가 품위를 매우 떨어뜨리는 것이었지만 아주 영리한 술책이었다. 기독교 교황이 용서해 주는 것을 거부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28. 독일과 이탈리아는 19세기 후반까지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그들은 뒤늦게 국가 통일을 이루었으며, 낭만주의 운동에 의해 조성된 강렬한 민족주의를 일찍 통일을 이룬 국가들보다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20세기에 파시즘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되는 가장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형태의 민족주의를 채택한 국가였다. 

 

29.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를 선언하는 것으로 선언하였으나 4년이 되어 단두대로 통치하는 자코뱅의 독재가 등장했다. 

 

30. 일반 사람들의 언어로서 라틴어는 사라졌지만, 학문, 문학, 그리고 교회의 언어로 라틴어는 생존했다. 

 

31. 중세 초에는 국가에 의한 조세가 없었다. 이전 로마제국에서 그리고 나중에 유럽의 신흥 국가들에서, 농민들은 납세자였다. 우리는 로마제국의 세금 징수 장면을 묘사한 유물에서 세금 징수원들의 모습을 있다. 업무 과정은 종이가 아니라 밀랍 상자에 기록되어 있다. 세금 징수는 제국을 운영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업무다. 

 

32. 1793년에 혁명이 더욱 급진화되고 새로운 헌정이 제정되었을 , 모든 부과조와 의무는 폐기되었다. 

농민들은 자기 땅의 완전한 주인이 되어 지주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19세기 내내 프랑스 정치에서 보수적인 세력이 되어, 사유재산을 공격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를 원한 도시의 급진적 노동계급 인민들에게 반대했다. 프랑스의 중요 인물들은 노동계급의 요구를 부결시키기 위해 언제나 농민들에 의존할 있었다. 

 

33. 잉글랜드의 지주와 차지인 사이에 근대적인 상업적 관계가 있었기에 훗날 농업혁명이라고 불리는 농업 생산성의 엄청난 도약이 가능했다. 

농업혁명은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모든 경작자들이 직면한 기본 문제는 정기적인 경작이 토지의질을 고갈시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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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에 북부 유럽에서는 삼포제가 도입되었는데, 부분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번째 부분은 휴경지로 두는 것이었다. 곡물은 여름에 심고, 곡물은 봄에 심었다. 효율성이 얼마나 증가했는지 보라. 토지의 절반 대신에 3분의 2 곡물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18세기 잉글랜드에서 농장은 부분으로 나뉘었고 각각에 작물을 심었다. 이것이 농업혁명이었다. 어떻게 작동한 것일까? 토지가 항상 경작된다면 토지의 질은 고갈되고 만다. 기술 배후에 있는 새로운 방식의 똑똑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작물 가운데 가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곡물이지만, 다른 가지는 순무나 클로버 같은 동물 사료였다. 작물들은 토지로부터 상이한 요소를 취하기 때문에 게속해서 작물을 재배해도 토지의 질은 고갈되지 않았다. 클로버는 대기 중의 질소를 토양에 고정시킴으로써 토지를 재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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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생산성 증대는 도시의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적은 비율의 사람들이 인구 전체에 식량을 공급할 있었다. 잉글랜드는 도약을 이루어 번째 대규모 근대국가였다. 

 

34. 유럽의 많은 부분이 순간으로부터 비롯된다. 국민에 대한 정부의 지배력은 아주 약했다. 유럽의 정부는 국민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분투해야 했다. 그들은 권력 확장에 대한 답례로 좋은 정부, 국왕이 보호와 안전을 제공하는 정부가 되어야 했다. 그들은 아시아와 중동의 수많은 제국과 왕국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단순히 세금과 공물을 징수하기 위한 기구를 운영할 수는 없었다. 

여러 세기 동안 국왕의 통제에 대한 위협은 그의 신민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 토지 소유 귀족들로부터 왔다. 그들은 결국 제압되지만 자신들의 고유 영역에서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 사유재산의 안전을 지킬 만큼 강력했다. 모든 것이 왕의 것은 아니다. 말이 유럽의 자유와 번영의 기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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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으며. 고급문화는 여러 요소의 혼합물이었고 세속적 지배에 견고하게 묶여 있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매우 총명했지만 그들의 총명함은 결코 통제를 벗어날 없었다. 따라서 혁신은 결코 근본을 뒤흔들지 못했다. 유럽 사회의 개방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근대 유럽 경제의 활력과 지적 생활의 소란은 단일한 권력이 책임을 떠맡고 좋든 나쁘든 그것을 형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경제적, 지적 활력의 다양한 유산은 완전히 탐구되고 확장될 있었다. 수학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믿음은 과학혁명 기간 동안에 실현되었고 그다음에는 기술혁신의 새로운 토대를 창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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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번째인가 아니면 괴짜인가?"그녀는 유럽이 괴짜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35. 유럽은 국가들의 집단이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항상 충돌이 있었다. 20세기에 유럽 국가들은 병사와 민간인이 전례 없이 대규모로 학살당한 차례의 끔찍한 전쟁을 치렀다. 번째 전쟁 기간 동안에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은 유럽의 유대인들을 체계적으로 몰살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이는 유럽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공포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당신에게 이미 소개한 세력이 중대한 역할을 했다. 하나는 독일에 지적 기원을 두고 있는 민족주의고, 하나는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화다. 

민족주의는 그들이 속한 국가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을 강화시키고 국가를 위해 기꺼이 싸우다 죽을 있다는 생각을 낳았다. 민족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 자신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중동부 유럽의 나라들에서 일어난 충돌의 일대 원천이었는데, 이제 나라들은 우리 역사의 일원이 되었다. 

산업화는 시골에서 사람들을 끌어내어 타운의 익명 사회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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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가 종교의 대용물 역할을 하여 개인들을 영원한 공동체 안에 자리 잡게 했다. 기독교 세계 속의 기독교도가 아니라 프랑스에 사는 프랑스인 또는 독일에 사는 독일인이 것이다. 새로운 신앙에 대한 애착을 보증해 노래와 깃발, 남녀 영웅들, 신성한 순간과 장소가 있었다. 

민족주의가 전쟁 발발에 기여했다면, 산업화는 전쟁을 더욱 무서운 것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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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공작기계가 개발되면서 모든 부품이 정확하게 똑같이 만들어질 있었고 그로 인해 신속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총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번째 생산물이었다. 그로부터 60 후에 자동차가 만들어졌다. 유럽에서는 인간사에 있어 새로운 규모가 등장했다. 대량생산, 대중사회, 대량 학살. 

 

36. 또한 산업화는 중간계급, 상인, 은행가, 제조업자 그리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전문직들의 지위를 상승시켰다. 

 

37. 새로운 타운에는 중간계급 공장 소유주와 노동자, 오직 계급만 존재했다. 노동 자체는 단조롭고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서툰 노동자만큼이나 유능한 노동자들도 그들을 곤궁에 빠트린 무역 쇠퇴 시기에 살아남기 위해 노동력 말고 가진 아무것도 없었다. 거주 형태를 보면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좁은 공간에서 움직일 있으며, 얼마나 적은 공기로 숨을 있고, 얼마나 적은 문명의 헤택을 누리면서도 있는지를" 시험해 보려는 듯하다. 

 

38. 의회를 개혁하기 위한 조치는 18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 1820년대에 개혁에 대한 요구가 다시 시작되었다. 중간계급에게 개혁은 주로 의회에 미치기 있는 귀족과 토지 소유 젠트리의 지배력을 끝장내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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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에서 야당은 개혁의 대의를 받아들였다. 야당은 휘그당이었는데, 그들 자신은 중간게급 사람들이 아니었다. 중간계급이기는 커녕 그들은 집권 중인 토리당보다 귀족적이었다. 휘그당은 가톨릭 국왕 제임스 2세에 맞서 모든 잉글랜드 사람들이 향유하는 권리와 잉글랜드식의 입헌군주제를 지키는 수호자로 간주했다.오랜 야당 생활을 그들은 1830년에 정권을 장악했고 엄청난 투쟁을 거쳐서 1832년에 번째 의회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것은 ㄴ토리당원이 다수를 차기하고 있는 귀족원과 토리당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대규모 시위와 행진을 통해 지지 집회를 해주었기 때문에 통과되었는데, 이런 행위는 개혁이 거부된다면 폭력이나 혁명이 뒤따를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1832 개혁법은 중간계급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축소되었거나 존재하지 않는 타운의 선출권을 없애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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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자, 노동계급 지도자들은 완전한 민주적 국가를 위한 자체의 프로그램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여섯 조항으로 이루어진 헌장으로, 지지자들을 차티스트라고 부른다. 조항은 다음과 같다. 모든 남성의 투표권 보장, 평등한 선거구 설정, 비밀투표 실시, 의회 의원의 재산 자격 폐지, 의원에게 보수 지급, 매년 의회 선거 실시.

 

39. 차티스트들이 청원 운동을 하고 있을 때조차, 지도자들은 정치적 권리가 그들에게 필요한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일에 종사했고, 어떤 이들은 노동자들이 음주를 삼가도록 하는 일을 했고, 어떤 이들은 그들을 소규모 보유지에 정착시키는 일을 했고, 어떤 이들은 노동조합 활동을 했으며,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을 건설하는 일에 종사했다. 이런 수단을 통해서 노동 인민들은 시민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이 되어 가고 있었고 활동은 1850년대 이후에 차티스트운동이 서서히 소멸되어 가고 있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차티스트가 일으킨 번의 거대한 소요는 경제 불황과 동시에 발생한 일들이었다. 1850 이후에는 좋은 시절이 이어졌고 노동자들의 생계 수준도 향상되었다. 게다가 1866년에는 약간의 외부 압력으로 휘그당의 계승자인 자유당 정부가 참정권 확대를 제안했다. 토리당은 대담하게도 자유당원들보다 파격적인 안을 내놓았고 1867년에 도시 노동자들 대부분에게 투표권을 주는 정책을 시행했다. 1884년에 자유당 정부는 시골 노동자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다. 2차와 3 개혁법은 여전히 성년 남자의 보통선거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권자는 세대주이거나 일정 금액 이상의 셋방에 사는 사람이어야 했다. 1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위해 싸운 수많은 병사들은 투표할 자격이 없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1918 4 개혁법이 사실상 성인 남자의 보통선거권을 확립하고 일부 여성, 30 이상의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영국의 통치자들은 정치적 분열 없이 산업 혁명의 사회적 혼란에 대처했다. 단계적으로 고래의 헌정이 확대되면서 노동자를 포함시켰으며 영국은 가장 안정적인 나라라는 명성을 얻었다. 

 

40.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혁명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 먼저 일어날 것이며 후진적인 나라들은 결코 공산주의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가르쳤지만,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시도되었다. 레닌이 옳았다. 전쟁의 중압은 마르크스 이론의 일부가 아니었지만 혁명가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통치되는 거대한 국가가 탄생했기 때문에 러시아혁명은 세계사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과학이라고 간주한 것을 제시했는데, 그것에 따르면 산업사회는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전복될 것이었다. 그의 '과학적' 예언은 빗나갔다. 그의 '과학' 수행한 일은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은 필연적이고, 역사는 그들의 편이며, 그들은 가차 없이 통치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도록 독려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르면 이런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장소에서 성공을 이끌어 냈다. 1917 러시아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1949 중국은 기이했다. 

 

41. 독일은 열강들 중에서 불안감을 조성하는 요소였다. 독일은 경제력이 성장함에 따라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는데, 이에 독일의 군사 지도자들은 1914 7월에 유럽을 향한 전쟁에 모든 것을 걸고 승리를 쟁취하려는 모험을 단행했다. 그들이 포착한 기회는 발칸반도의 위기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제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제국의 남쪽 끝에 위치한 보스니아를 방문했다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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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정부는 암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세르비아를 너무 가혹하게 대한다면, 나라가 러시아와 더불어 전쟁을 도발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독일은 가혹하게 대하라고 오스트리아를 자극했고, 독일 황제 본인은 오스트리아가 무엇을 하든 자신은 그것을 지지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가 자신들에게 저항하지 않을 없을 정도로 혹독해서 전쟁을 일으킬 이유를 제공하도록 기획된 요구 사항을 세르비아에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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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다른 열강들에게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제시한 요구 사항들과 자신들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굴면서 평화적 해결을 위한 모든 시도를 좌초시켰다. 독일의 군사 지도자들은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자극받아 전쟁에 돌입하기를 바랐다. 

 

42. 독일 군대는 파리를 포위하기보다는 파리 북쪽으로 지나갔고 프랑스와 영국의 군대는 그들의 측면을 공격할 있었다.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를 가로질러 중립국인 스위스까지 뻗어 있는 참호선에서 양쪽 군대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상대편을 밀어내려는 수많은 시도 속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지만, 3 동안 전선은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방어하는 쪽이 유리했다. 참호에서 기어 나온 사람들은 상대편 참호로부터 기관총 사격을 받았고 위에서는 폭탄이 떨어졌으며 통로에는 가시철조망이 가로놓여 있었다. 자살 행위에 해당하는 임무였다. 전쟁 마지막 해에 이르러서야 영국의 발명품인 탱크로 공격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살인 기계에 사람과 금속을 가장 오래 공급할 있는 쪽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었다. 경제 전체가 전쟁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조직되어야만 했다. 국민 전체가 대의를 믿고 싸우고 일하도록 결집되어야 했고 그대로 총력전이었다. 

영국 해군은 해외에서 독일로 물자가 반입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바다를 봉쇄했다. 독일 해군은 영국에 물자와 가장 중요한 식량을 공급하는 선박들을 침몰시키기 위해 잠수함들(U-boat) 파견했다. 

 

43. 독일은 폴란드를 만들기 위해 동쪽의 영토를 잃었고, 서쪽에서는 알자스와 로렌을 읽었다. 독일은 라인강가에서 50킬로미터 안에는 군대나 군사 설비를 설치할 없었다. 독일의 방위군은 인원이나 장비에 있어 엄격하게 제한받을 것이며 공군은 운영할 없었다. 전쟁으로 발생한 피해 보상금으로 막대한 액수가 책정될 것이었다. 베르사유조약은 전쟁을 시작한 것에 대해 독일에게 명백하게 유죄 선고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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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공화국이 출범한 2 , 독일 사회는 극심한 인플레이션, 화폐를 거의 가치 없게 만들어 버린 급속한 가격 상승에 의해 무질서 상태에 빠졌다. 

 

44. 192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 히틀러의 당은 주변적인 위치에 있었다. 당은 국가사회주의당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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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은 사회주의적이기보다는 훨씬 국가적이었다. 히틀러는 정당 분열을 끝내고 자신의 지도 아래서 통일도니 국가를 건설하고 싶어했다. 많은 정치가들이 합의한 베르사유의 제한들을 뒤집어덮을만큼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 지금은 열등한 슬라브족들 ,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이 차지하고 있는 동쪽 지역에 독일 민족을 위한 '생활공간' 확보하고자 했다. 독일제국 내부의 적들은 제거되어야 했다. 여기에는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 양쪽 모두가 포함되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었다. 

 

45.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감탄했지만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을 흉내내려는 그의 시도는 끔찍한 실패작이었다. 경찰만으로 그것을 제지하기에 충분했다. 짧게 사격을 주고받았고 경찰 명과 히틀러 열네 명이 사망했다. 히틀러는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소요를일으킨 다른 우익 민족주의 반역자들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5 형을 받았다. 이는 그가 애국적인 동기를 가지고 행동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 반역자들은 보통 재판을 받지 않고 사살되었으며 혐오스럽게도 루덴도르프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히틀러는 교도소가 아니라 정치범들을 위해 사용되고 있었던 오래된 성에 편안하게 수용되었다. 그는 읽고, 생각하고, 저술할 여가를 누렸다. 이때 <나의 투쟁>이라고 불리는 장황하고 두서없는 훗날 그의 운동의 성전이 되었다. 책은 그의 인생 이야기, 정치적 견해 그리고 인종 투쟁의 역사와 미래를 잡탕으로 섞어 놓은 것이었다. 독착적인 사상은 전혀 없었다. 독창적인 구절들은 군중을 설득하여 그들의 마음을 바꾸게 하는 방법, 그가 '집단 암시' '집단효과'라고 부른 것에 대한 발견을 기록한 것이었다. 연설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인쇄물은 너무나 차분한 매체였다.

 

46. 나중에 히틀러는 뮌헨 맥주홀에서 연설하는 것을 그만두고 매우 면밀하게 기획되고 연출된 거대한 장외 집회들을 주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집회들이 작동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고독하고 불확실한 개인이 공동체의 일부가 되고 그리하여 공동체의 사기가 치솟는다. 

 

47. 히틀러는 5개월 안에 러시아를 패배시킬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중대한 계산 착오였다. 전격전은 러시아의 광대한 공간에서는 그리고 거대한 예비 인력을 지니고 있는 적에 대해서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았다. 

 

48. 1951년에는 다른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과거의 적이었던 독일과 프랑스는 석탄과 자원을 공유하여 강철 생산에서 경쟁자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1958년에 유럽공동시장이 나왔는데, 이는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여섯 나라의 집단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협의들은 독일이 국제사회로 다시 받아들여지고 다른 나라들과 평화로운 관계로 결속되는 방식이었다. 경제적 협력은 1993년에 유럽연합으로 성장했는데 이것은 유럽 연방으로 발전해 가고 있던 정치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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