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김훈)
1. 나는 이런 패키지보다는 식재료의 개별성이 한 개씩 씹히는 음식을 좋아한다. 무더운 여름날, 몸과 마음이 지쳐서 흐느적거릴 때, 밥을 물에 말고 밥숟가락 위에 통통한 새우젓을 한 마리씩 얹어서 점심을 먹으면 뱃속이 편안해지고 질퍽거리던 마음이 보송보송해진다. 잘 익어서 사각거리는 오이지를 고추장에 찍어서 물에 만 밥을 먹거나, 소금물에 담근 짠지를 가늘게 썰어서 찬물에 띄우고 거기에 식초와 고춧가루를 쳐서 먹으면 마음이 개운해진다. 마음이 개운해진다는 것은 느끼하고 비리고 들척지근한 것들을 생리적으로 내친다는 뜻이다. 나는 무짠지가 우러난 국물에 찬밥을 말아먹는다. 그 맛은 단순하고 선명해서 음식의 맛이라기보다는 모든 맛이 발생하기 이전의 새벽의 맛이고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시원적인 맛이다.
2.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비틀어서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걸로 밥을 다 먹는 자들도 있는데, 이 또한 밥에 관한 일인지라 하는 수 없다. 다만 연민스러울 뿐이다.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국면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얘야 돈이 없다면 돈보다 큰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부라! 돈은 인의예지의 기초다. 물적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놓은 것들이 대부분 무너진다. 이 사태는 인간의 삶의 적이다. 이것은 유물론이 아니고, 경험칙이다. 이 경험칙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공히 유효하다. 돈 없이도 혼자서 고상하게 잘난 척하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말아라. 추악하고 안쓰럽고 남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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