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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독서노트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유발 하라리)

by Say_Young 2021. 6. 25.

1. 하지만 2018년의 보통 사람은 점점 자신이 사회와 무관하다고 느낀다. 수많은 신비한 단어들 - 세계화, 블록체인, 유전공학, 인공지능, 기계학습 - 테드 강연과 정부 싱크탱크, 하이테크 콘퍼런스 같은 곳에서 신나게 오르내리지만, 보통 사람은 중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다고 의심할 법하다. 자유주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보통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하면 사이보그와 알고리즘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도 그런 적실성을 유지할 있을까?

 

2. 사람들이 인공지능, 빅데이터 알고리즘, 생명공학에 대한 이야기에 참을성을 잃거나 지루해하면 한마디 마술같은 단어로 사람들의 주의를 다시 모을 있다. 바로 일자리다. 기술 혁명은 조만간 수십억 인간을 고용 시장에서 몰아내고, 막대한 규모의 새로운 무용계급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3. 인간에게는 가지 유형의 능력이 있다. 육체적 능력과 인지적 능력이다. 과거 기계가 인간과 경쟁한 것은 주로 순수 육체적 능력에서였다. 반면에 인간은 인지력에서 기계보다 월등하게 유리했다. 결과, 농업과 산업 분야의 수작업은 모두 자동화되었지만, 인간에게만 있는 인지적 기술이 필요한 새로운 서비스직들이 생겨났다. 인간만의 인지적 기술이란 학습과 분석, 의사소통, 무엇보다 인간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렇지만  AI 이제 이런 기술에서도 점점 인간을 추월하고 있다. 

 

4. 인간은 개별자이기 때문에 서로서로 연결해서 모두를 최신 상태로 유지하기가 어렵다. 반면에 컴퓨터는 개별자가 아니어서 하나의 탄력적인 네트워크로 통합하기가 쉽다. 라서 우리가 직면한 위협은 수백만의 개별 인간 노동자를 수백만의 개별 로봇과 컴퓨터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개별 인간은 통합된 네트워크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5. 기술은 결코 결정론적이지 않다. 무언가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신기술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같고 경제적으로 수익성이 있어 보이더라도 정부는 규제를 통해 막아낼 있다. 가령, 지난 수십 동안 기술적으로 보면 인간 장기 시장도 생겨날 있었다. 저개발국의 인간신체 농장 절박한 부자 구매자들의 거의 무한정한 수요라는 여건이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 그런 신체 농장은 수천 달러를 호가할 있었다. 하지만 규제가 인간 신체 기관의 자유 거래를 막았다. 지금도 장기 매매 암시장이 있긴 하지만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작고 한정돼 있다.

 

6. 지금 세계에서 불의의 대부분은 개인의 선입견보다는 대규모의 구조적 편향에서 나온다. 하지만 우리 수렵채집인의 뇌는 그런 구조적 편향을 감지하도록 진화하지는 않았다. 그런 편향의 적어도 일부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 연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

 

7. 사실 인간은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왔다. 호모 사피엔스야말로 탈진실의 종이다. 호모 사피엔스 특유의 힘은 허구를 만들고 믿는 데서 나온다. 석기시대 이래 줄곧 자기 강화형 신화는 인간 집단을 하나로 묶는 기여해왔다. 

 

8. 1,000명의 사람이 어떤 조작된 이야기를 동안 믿으면 그것은 가짜 뉴스다. 반면에 10 명의 사람이 1,000년동안 믿으면 그것은 종교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가짜 뉴스라고 불러서는 된다는 충고를 들어왔다. 신도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허구들이 반드시 무가치하거나 해롭기만 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아름다우며 영감을 주는 것일 있다. 

 

9. 어떻게 하면 세뇌를 피하고, 현실과 허구를 구분할지에 관해서는 20장에서 훨씬 깊이 살펴볼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개략적인 요령 가지만 제시하겠다. 

첫째, 믿을 만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만약 뉴스를 공짜로 얻는다면 당신이 상품이기 쉽다.

번째 요령은, 만약 어떤 이슈가 특별히 중요해 보인다면 그것에 관련된 과학 문헌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과학 문헌이란 동료 평가를 거치는 논문, 저명한 학술 출판사가 , 명망 있는 기관의 교수가 저술이다. 과학 역시 나름의 한계가 분명히 있다. 과거에도 많은 오류가 있었다. 그럼에도 과학 공동체는 세기 동안 우리가 가장 신뢰할 있는 지식의 원천이었다. 

 

10.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협력을 잘할 있기 때문이고, 협력을 그토록 잘할 있는 비결은 허구를 믿기 때문이다. … 근대 자본주의 신화에 관한 우리의 믿음도 할리우드와 산업의 예술적인 창조물에 의해 뒷받침된다. 우리가 물건을 많이 사면 행복해질거라고 믿는 것도, 우리 눈으로 텔레비전에서 자본주의의 낙원을 봤기 때문이다. 

 

11. 학교는 기술적 기량의 교육 비중을 낮추고 종합적인 목적의 삶의 기술을 강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며, 낯선 상황에서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일 것이다. 2050년의 세계에 발맞춰 살아가려면 새로운 생각과 상품을 발명하는 그쳐서는 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재발명해야 것이다. 

 

12. 21세기 중반이 되면 변화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 데다 수명까지 길어지면서 전통적인 모델은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인생은 조각조각 부서지고, 서로 다른 기간들 사이에 연속성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전에 없이 다급하고 복잡한 질문으로 떠오를 것이다. 과정은 엄청난 수준의 스트레스를 동반할 가능성이 크다. 변화는 거의 스트레스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어떤 나이가 지나면 대다수 사람들은 아예 변화를 싫어한다. 15 때만 해도 전체가 변화다. 몸도 자라고 정신도 발달하고 인간관계도 깊어진다. 이때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모든 것이 새롭다. 누구나 자신을 발명하느라 분주한 시기다. 대다수 10대는 시기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시기는 흥미진진하다. 새로운 지평이 눈앞에 펼쳐지고, 세상이 나의 정복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50세가 되면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대다수 사람들은 세계 정복 같은 것은 포기한 상태다. 거기도 가봤고, 그것도 해봤고, 그곳 기념 티셔츠도 갖고 있다. 그러니 안정을 선호할밖에.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자신의 기량과 정력, 정체성, 세계관에 쏟아부은 상태여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다. 무언가를 쌓는 열심이었을수록 그것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것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가 어렵다. 여전히 새로운 경험과 약간의 조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을 있지만, 대부분의 50대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격의 심층 구조를 뜯어고치는 소극적이다.

 

13.그런 세계에서도 살아남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강한 정신적 탄력성과 풍부한 감정적 균형감이 필요할 것이다. 반복해서 지금 자신이 가장 아는 중에서도 어떤 것은 버리고, 그전에는 자신이 몰랐던 것도 편안히 받아들일 있어야 한다. 

 

14. 스마트폰에 얼굴을 붙인 길을 오가는 좀비들을 적이 있는가? 그들이 기술을 통제하는 걸까? 기술이 그들을 통제하는 걸까?

 

15. 우리에게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이야기는 모두가 허구적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믿어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야기를 실제처럼 느끼게 있을까? 인간이 이야기를 믿고 싶어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실제로 믿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미 수천 전에 사제들과 무당들은 답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의식이다. 의식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고 허구적인 것을 실제로 만드는 마술적인 행동이다. … 모든 의식 중에서도 가장 잠재력이 것이 바로 희생이다. 세상 모든 중에 고통이야말로 가장 실감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은 결코 누구도 무시하거나 의심할 없다. 람들에게 어떤 허구를 정말로 믿게 만들고 싶다면, 그것을 대신해서 희생하는 쪽으로 그들을 유도하라. 누구라도 이야기를 위해 고통을 체험하고 나면 대부분 이야기가 실제라고 확신하게 있다. 가령, 신의 명령이라 믿고 금식을 하면 배고픔의 생생한 느낌이 어떤 조각상이나 아이콘보다 강하게 신의 존재를 실감하게 만든다. 애국심에서 나간 전쟁에서 다리를 잃으면 어떤 시나 국가보다 생생하게 다리가 잘려나간 부위와 휠체어로 국가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물론 이것은 논리상 오류다. 신이나 국가에 대한 믿음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해서 믿음이 참으로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속아 넘어가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뿐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바보라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특정한 믿음을 위한 희생이 크면 클수록 신앙은 강해진다. 이것이 신비한 희생의 연금술이다. 희생적인 사제는 사람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 비도, 돈도, 전쟁의 승리도. 그보다는 무언가를 없애면 된다. 

똑같은 원리가 상업 세계에서도 작동한다. 만일 당신이 중고 피아트를 2,000달러에 구입하면, 들을 의향이 있는 누구에게든 차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신형 페라리를 20 달러에 구입하면, 동네방네 칭송하고 다닐 것이다. 그만큼 좋은 차여서가 아니라, 큰돈을 주고 샀기 때문에 당신으로서는 그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차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16. 만약 우리의 욕망이 완전히 자유로운 마술 같은 발현이 아니라 생화학적인 과정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환상이라면 무엇이든 실현하려 애쓰기보다 자기 자신과 정신, 그리고 욕망을 이해하는 것이 낫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내디뎌야 결정적인 걸음은, ‘자아야말로 우리 정신의 복잡한 매커니즘이 끊임없이 지어내고 업데이트하고 재작성하는 허구적 이야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시대가 되어 이런 개인의 신화 제조 과정을 이전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관찰할 있다. 왜냐하면 조정 과정의 일부야말로 우리 정신이 하던 일을 컴퓨터에 아웃소싱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완벽한 자아를 구축하고 장식하는 무수한 시간을 쏟는 가운데, 점점 자신의 창작물에 고착화돼가고, 자신의 실체와 그것을 착각하는 것을 보면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두렵다. 덕분에 실상은 교통 체증과 사소한 말다툼, 긴장된 침묵으로 가득할 뿐인 가족 휴가는 아름다운 풍경의 파노라마와 완벽한 저녁식사, 웃음 가득한 얼굴의 모음으로 둔갑한다. 우리가 실제 경험하는 것의 99퍼센트는 자아의 이야기에서 누락된다. 우리의 실제 경험은 신체적인 비해, 우리의 환상 속에서 빚어지는 자아는 아주 시각적이기 쉽다는 시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싶다면 페이스북 계정이나 자기 내면에서 하는 이야기와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된다. 대신 몸과 마음의 실제 흐름을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이성의 많은 개입 없이도, 그리고 자신의 아무런 지시 없이도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이 스스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이런 저런 바람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바뀌어 불면서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것과 같다. 당신은 바람이 아닌 것처럼, 당신이 체험하는 생각과 감정과 욕망의 혼합체도 아니다. 또한 그것들을 지나오고 눈으로 보고 들려주는 세탁된 이야기도 분명히 아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체험했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는 없다. 가질 수도 없다. 체험들의 합도 아니다. 사람들은 묻는다.나는 누구인가?” 그런 다음 어떤 이야기를 들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번째 사실은, 당신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17. 비록 이런 이야기들 모두가 우리 자신의 정신이 만들어낸 허구라 해도 좌절할 이유는 없다. 실체는 여전히 그대로 존재한다. 가공의 드라마에서는 역할을 맡을 없다. 그런데도 그것을 맡고 싶어하는가?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질문은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니라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느냐이다. 모든 허구적 이야기를 포함하면 이전보다 훨씬 명료하게 실체를 관찰할 있다. 자신과 세계에 관한 진실을 안다면 아무것도 당신을 비참하게 만들 없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인간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허구적 이야기를 만들고 믿는 능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특히 우리는 허구와 실체의 차이를 아는 서툴다.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만약 그럼에도 차이를 알고 싶어 한다면 시작점은 고통이다.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것은 고통이다.

어떤 거대한 이야기에 직면했을 , 그리고 그것이 실체인지 상상인지 알고 싶다면 핵심 질문 하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고통을 느낄 있는지 묻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폴란드 국가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잠시 폴란드가 고통을 느낄 있는지 생각해보라. 

 

18. 그러니 정치인이 신비로운 용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는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이해하기 힘든 거창한 속에 숨기는 방법으로 실제 고통을 위장하고 변명하려 들지 모른다. 특히 다음 단어를 조심해야 한다. 희생, 영원, 순수, 구원. 어떤 단어라도 듣게 되면 경보음을 울려야 한다.그들의 희생이 영원한 우리 민족의 순수함을 구원할 이라는 말을 지도자가 상습적으로 해대는 나라에 살고 있다면 각오해야 한다. 정신을 온전히 보존하려면 그런 지도자의 주문은 현실의 용어로 바꿔 이해해야 한다. , “병사들은 고뇌 속에서 울고, 여성은 얻어맞고 야만적인 취급을 당하며, 아이는 두려움 속에 떨게 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우주와 삶의 의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은가. 가장 좋은 출발점은 먼저 고통을 관찰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다. 답은 결코 이야기가 아니다.

 

19. 앞에서 그토록 많은 이야기와 종교, 이데올리기들을 비판했으니 이제 역시 자신을 비판의 시선에 올려놓고, 그렇게나 회의적인 사람이 그러면서도 어떻게 아침에 기분 좋게 일어날 있는지 비결을 설명하는 것이 공평하겠다. 

내가 쉬는 것을 관찰하면서 처음 알게 것은, 그전까지 내가 읽었던 모든 책과 대학 시절 참석했던 모든 수업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신에 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것을 통제할 능력도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의 가장 깊은 원천은 자신의 정신 패턴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뭔가를 바라는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 정신은 고통을 일으키는 것으로 반응한다. 고통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 조건이 아니다. 자신의 정신이 일으키는 정신적 반응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더한 고통의 발생을 그치는 걸음이다. 

이런 수행을 통해 얻는 집중력과 명정함이 없었다면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쓰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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